묘비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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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좌의정左議政 포저 익浦渚翼1) 찬
시조 고려개국공신 삼중대광 문하시중평장사 묘비음기
始祖高麗開國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墓碑陰記
동방에 있는 조씨趙氏 중에서는 오직 우리 풍양豐壤이 가장 오래되었고 다른 곳의 조씨들은 모두 뒤에 나왔으며, 자손이 번성한 것 역시 풍양만 한 곳이 없다.
생각건대, 우리 시조는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삼한三韓을 평정함으로써 벽상개국壁上開國의 훈호勳號를 하사받았고 작위는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지위는 재상宰相에 올랐으니, 우리 동방에 큰 훈덕勳德을 끼쳤다고 하겠다. 대개 시조가 처음에 전원田園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 것이 마치 여상呂尙이 주 문왕周文王을 만난 고사2) 와 같았다고 말하는데, 세대의 거리가 멀고 증명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그 사적事蹟이 널리 전해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추의 유감이라고 할 것이다.
보첩譜牒 역시 빠진 곳이 있어서 불완전하다. 지금 전하는 보첩은 바로 분실하고 난 나머지를 거두어 모은 것이다. 여기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시조 뒤에 바로 천화사天和寺 전직殿直 휘諱 지란之藺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해설을 보면 23대손이라고 하고 혹은 13대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직이 고려 어느 왕의 시대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는데, 시조와 워낙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그 이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도시 알 길이 없다.
석간石磵이 지은 자신의 묘지墓誌를 보면 고려 태조의 신臣 평장사平章事 모某의 30대손이라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보첩이 있어서 대수代數를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석간의 휘는 운흘云仡인데,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그는 고려 말의 혼란한 세상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칭송하며 흠모하는 분이다.
고려 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7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관朝官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지금 조정에 있는 이들이 비록 많지 않다고는 하나 다른 곳의 조씨들과 비교하면 실로 몇 배나 되며, 산직散職에 있거나 외방外方에 나가 있는 자들이 또 매우 많다. 그리고 외손들의 경우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알고 있는 자들만 하더라도 거의 반은 조신朝紳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에서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현달한 자들이 또 많은데 간신姦臣이나 난신亂臣의 이름을 얻은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조선祖先의 순후醇厚한 덕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 우리 선조가 성인聖人을 협찬協贊하여 난세亂世를 구제하고 태평 시대를 열어 준 그 공덕이 만세토록 이어질 것이니, 그 자손이 끝없이 번성할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과거 선묘宣廟의 조정 때에 공빈恭嬪 김씨金氏를 선조의 묘소 뒤에 장례 지냈는데, 김씨는 실로 선조의 외손이었다. 그리고 선묘 역시 조맹趙孟은 나에게 외조가 된다고 말하고는 선조의 묘소를 봉분封墳한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김씨를 위해서 산지山地를 고를 적에 그 지역에 사는 후손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응당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는데 그날 과연 징험이 되었다고 한다.
광해光海 때에 이르러 공빈을 추존追尊하여 그 묘소를 능陵으로 승격시키면서 시조 묘소의 봉분이 헐려서 평평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와서 그 능호陵號가 없어졌으므로 제손諸孫이 서로 더불어 위에 글을 올려 그 봉분을 원상대로 회복시키고는 비석을 세워서 그 시말始末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모두 먼 후손들로서 우리 시조보다 거의 천 년 뒤에 태어나 마침 구묘丘墓가 헐리는 재액을 당하였으나, 힘을 모아 노력한 결과 앞으로 영원히 전해질 수 있게 하였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명단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기에, 마침내 비문碑文에 기재되지 않은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비문의 뒷면에 새기는 한편, 후손 약간 명의 이름을 뒤에 기록하였으며, 외손 중에서도 분묘 공사 때에 힘을 보탠 약간 명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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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高麗開國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墓碑陰記 趙氏在東方者 惟我豐壤爲最舊 他處之趙皆後出 子孫之蕃 亦無如豐壤也 惟始祖佐高麗太祖定三韓 賜勳壁上開國 爵至三重大匡 致位宰相 有大勳德於東方 蓋其始起自田間 如呂尙之遇文王云 然世遠文獻無可徵 事蹟不大傳 實千載之恨也 譜牒亦殘缺 今所有譜 乃掇拾於放失之餘 譜所載 始祖後自天和寺殿直諱之藺始 註云二十三代孫 或云十三代 不知殿直當麗何王時 而距始祖已遠 其前莫知也 觀石磵自製墓誌 云高麗太祖臣平章事某三十代孫 是時必有譜知世數也 石磵諱云仡 官至政堂文學 有文集 當麗末世亂 以智自全 爲世所稱慕 自麗初至今七百有餘歲 寇冕不絶 今立朝者雖不多 視他處之趙 實倍簁 散處外方者甚多 至於外裔則無由而知 知者亦幾半朝紳 且自麗及本朝 顯者亦多矣 未聞有以姦亂名者 斯亦祖先醇德有以致然歟 噫 我祖協贊聖人 濟屯蒙開太平 功德存於萬世 宜其子孫之綿遠也 曩在宣廟朝 恭嬪金氏葬墓後 金氏實外裔 宣廟亦謂趙孟於吾亦外祖也 命封其墓 初爲金氏擇山也 其地裔孫夢老人告當然 其日果驗云 至光海時 追尊恭嬪 陞其墓爲陵 始祖墓見夷 及今陵罷 諸孫相與上聞復其墳 因立石記始末 又相謂吾屬俱以末裔 後我祖幾千年 適當丘墓之厄 得有以致力 使永世有所識 茲豈非天哉 其名宜錄以示後 遂略掇碑文所不載者記其陰 且錄其裔孫名若干于後 外孫亦錄其脩墓時出力者若干云 姓孫時有官或未仕 在京者 行護軍守彝 僉正瑩中 承旨邦直 參議國賓 奉常正璞 縣監時中 幼學珉翰 林珩 幼學浹 湜 澳 佐郞潝 正郞溭 幼學泌 沃 正字 績 縣監涑 夢陽 沔 縣監㴶 敎官全素 進士汝彬 幼學玉亨 光亨 進陽 復陽 來陽 汝相 汝㰒 汝桓 從耘 元耘 伯耘 仲耘 生員汝秀等 尙州 參奉光壁 奉常正靖 直長竤 主簿基遠 郡守亨遠 別坐稛 等 林川 參奉邦亮 幼學孝胤璜 等 海州 佐郞光玹 幼學光瑗 孝繼 孝曄 等 春川 監察潭 幼學宗仁 等 豐壤 行護軍溟鵬 幼學夔 司果孝寬 等 忠州 幼學蓍漢 匡漢 等 利川 幼學大胤 等 楊口 幼學繼緖 等 江陵 幼學汝○ 等 抱川 輝緖 等 百五十餘人 外孫 吏曹判書洪瑞鳳 德昌君張紳 同知洪憙 留守李時白 兵使李沅 李義培 觀察使 鄭世矩 李如璜 僉知尹晥 府使李久澄 掌令兪守曾 經歷許寔 郡守沈詻 李尙伋 金知復 許徵 洪怒 韓善一 許啓 兪是曾 洪振文 李厚培 李厚源 朴○ 敎理辛啓榮 李德壽 正郞李後陽 縣令尹挺之 崔熅 金怡 李銘立 判官 尹應之 兪汝諧 縣監 柳時會 睦性善 朴漪 金慶桓 李應荚 崔振溟 任絖 成俊彦 柳時英 具橚 成櫟 沈長世 李必成 徐貞履 尹悦之 監察 李逈 察訪蔡衡 李明傳 邊孝誠 鄭翼卿 柳元之 都事金 別坐崔嶪 等 百餘人 後孫 嘉善大夫前吏曹參判兼成均館大司成 翼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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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1) 조선시대 17대 효종(孝宗) 때의 문신ㆍ학자. 자는 비경(飛????), 호는 포저(浦渚). 본은 풍양(豐壤). 14대 선조 35(1602)년 문과에 급제, 직제학ㆍ대사헌을 거쳐 효종 초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이룬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며, 문장에 뛰어나다. 시호는 문효(文孝). 저서로는 포저집(浦渚集), 포저유서(浦渚遺書), 가례향의(家禮鄕宜), 주서요류(朱書要類) 등이 있으며,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신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2) 여상은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로 태공망(太公望) 혹은 강 태공(姜太公)이라고도 한다. 위수(渭水) 가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